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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이야기

조각의 시작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신석기 거석 문화

by 이든혜윰 2023. 11. 17.


높이가 약 11cm인 풍만한 육체의 이 기이한 석회암 덩어리는 인류 최초의 조각이라 일컬어지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이다.
오스트리아 북부 빌렌도르프(Willendorf)에서 발견된 이 비너스는 1909년 발견되자마자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모았고 곧 구석기 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기원전 3만 년에서 2만5천 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로셀의 비너스', '돌니 베스토니체의 비너스'와 종종 비교되기도 하지만 이들 비너스보다 입체적인 양감이 뛰어나며 인체의 비례를 염두에 두고 제작한 조형성이 돋보인다.
조각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그 형태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고 있으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비너스는 삶과 죽음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자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손에 쥘 수 있도록 작은 형태로 만들어져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며 심리적 안도감을 느꼈던 것으로 일종의 부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부적은 본능적으로 인간 존재와 생존에 대한 애착과 관심을 드러내는 일종의 신앙적 상징물이다. 부적의 역할은 원시 시대 자연환경의 불가항력적 천재지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안전한 일상을 보장받고자 하는 암시적이고 마술적인 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약간 고개를 숙인 조각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붉은색을 칠해 놓은 흔적이 있는데 그 당시의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재료는 비교적 다루기 쉬운 석회암 덩어리로, 몸 전체의 거칠거칠한 표면 질감은 석회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왜곡된 형태의 의미를 조금씩 유추해 보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안전한 출산과 다산의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목적의 부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부푼 배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비대한 가슴과 엉덩이는 여성의 성에 대한 지나친 과장과 의도적인 표현으로, 다산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포함한 구석기의 비너스 상들은 풍요의 상징인 대모신을 받들고 모계 질서를 존중했던 구석기인들의 믿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임산부들 스스로 자신들의 변해가는 몸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는 재미있는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비롯한 다양한 원시 미술의 실체는 그 시기의 생활상 및 인간 활동의 흔적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인류 진화의 전개와 원시 사회의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당시는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며 동굴에서 공동생활을 영위했는데 주변에 산재한 위험 요소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주술적인 신앙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부적이 출현했으며 비너스 상뿐만 아니라 남성상, 동물 조각상 등 작은 조각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2만년에서 1만 4천년경 에스파냐(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는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주거 양식을 암시하고 있다. 이 벽화들은 수렵과 채집의 단계에서 발전하여 사로잡은 짐승을 사육하는 유목민의 생활양식을 구체적이고 서술적인 시각 언어로 보여줌으로써 원시 사회의 진화를 짐작하게 해준다.

 

신석기 시대의 생활환경은 구석기 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진일보한 양상을 보인다. 주거지의 경우 자연적인 동굴 형태에서 나무, 짚, 흙 등의 재료를 이용한 단순한 건축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주거 양식의 변화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했고, 유동적인 수렵과 채집에서 점차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농경 문화로의 이행을 촉구했다.
농업으로 인한 생활환경의 변화는 가족이라는 구성원을 의식하게 했고, 가축을 사육하게 했으며, 새로운 농업 기술의 개발과 도구의 발달을 촉진했다. 이 같은 공동체 씨족 사회로의 발전은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며 개인적인 취향의 종교 관습으로부터 집단적인 원시 종교 형태로의 변화를 촉발했다.
개인적인 소망의 표현에 앞서서 공동체의 집단의식을 우선시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집단의식을 거행할 집회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거석문화의 상징인 '스톤헨지'는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유적으로서 신석기시대에 문화, 경제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스톤헨지는 현대 조각의 조형적 관점에서 볼 때도  조형물로서의 기념비적인 느낌이 살아 있다. 기원전 2000년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이 기념물은 영국 윌트셔주의 솔즈베리 평원에 자리 잡고 있다.
스톤헨지의 높이는 약 4m에 이르고 가장 바깥쪽 원의 지름은 141m이며, 테두리에는 얕은 도랑이 파여 있고 그 안쪽으로는 말발굽 모양의 돌들이 둘러쳐져 있다. 중앙부의 바깥쪽 원의 지름은 약 32m이며 입석이 2중으로 둥글게 배치되어 있는데, 불규칙한 육면체의 입석 30개 위에 크고 작은 판석들이 얹혀 있다. 그리고 중앙부의 안쪽 원에는 작은 크기의 돌들이 지름 23m로 줄지어 있다.
스톤헨지를 구성하고 있는 돌의 일부는 약 2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운반된 것이다. 신석기 시대의 생활 환경과 기술의 발달 정도로 보아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무거운 돌들을 운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청석 또한 단단한 사질 사암으로 된 이 돌들은 개당 50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무게로, 이 돌들을 들어 올려 안전한 형태로 유지했다는 사실은 어떤 상황에서든 발휘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경외심을 품게 만든다. 최근 영국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 그 당시의 운반 경로를 따라 돌들을 운반해 보려고 했으나 돌들의 엄청난 무게 때문에 실패했다고 한다.
대평원 위에서 중요한 의식을 거행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장소의 전체적인 구조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의 해 뜨는 방향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태양신의 숭배 의식 장소로 사용됐을 것이 확실하지만 여전히 과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의 스톤헨지는 영국의 석기 시대에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톤헨지는 돌멘(Dolmen), 멘히르(Menhir), 알리뉴망(Alignement) 그리고 크롬레흐(Cromlech)와 같이 당시의 집단적인 종교의식의 거행 장소로 사용됐으며 거석문화의 중요한 역사가 되고 있다. 또한 군락을 이루는 거대한 크기의 돌들을 통해서 기념비적 형태의 구축이라는 조형성도 엿볼 수 있다.
스톤헨지를 비롯한 거석 축조물에서 신석기 시대 조각의 요소들을 기대하기란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므로 유물들을 통해서 궁금증을 해결해야만 하는데, 흙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작은 인형인 소형 토우나 소형 부적 그리고 토기 등에서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유물들은 흙과 불을 이용한 테라코타 조각상으로, 선사인들의 다양한 조형 감각을 엿볼 수 있으며 조각의 시발점을 알리는 단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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