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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이야기

미켈란젤로의 작품 세계

by 이든혜윰 2023. 12. 5.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에 석공을 남편으로 둔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그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부터 조각과 소며 등 미술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조각가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에게 보다 존경받는 직업을 갖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가 소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가 15살 때 피렌체에 있는 그의 궁전에 데리고 와서 수양아들로 삼는다.

미켈란젤로는 누구보다도 예술가의 위상을 높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창조의 재능은 신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미켈란젤로는 모든 관습을 깨뜨렸다. 숭배자들은 그를 '신성한 사람'으로 불렀을 정도였지만 그 댓가는 고독뿐이었다. 한 번은 그의 라이벌인 라파엘로가 귀족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을 본 미켈란젤로가 "귀족 도련님처럼 찬미자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를 가냐?"하고 묻자 라파엘로가 "그럼 당신은 사형 집행인처럼 혼자서 어디를 그렇게 가시나요?"하고 응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미켈란젤로는 일체 제자를 두지 않았고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미켈란젤로에게 결혼을 하지 않아서 후계자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자 "나에게는 끊임없이 나를 들볶아 대는 예술이라는 마누라가 있고 내가 남긴 작품이 나의 자식들이오."하고 대답했다. 그는 매우 격정적이고 강직하며 거침없이 행동했으며 오직 채석장에 있을 때나 작업중일 때에만 행복해하였다. 그의 유머 감각은 신랄해서 어느 날 사람들이 어떤 화가의 그림 속 황소가 매우 잘 묘사되었다고 칭찬하자 "모든 화가들이 자신의 초상은 잘 그리는 법이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건축가, 화가, 조각가, 공학자로 활약할 정도로 매우 광범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산 전체를 거대한 조각품으로 만들려고 계획한 적도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약 90세까지 장수했으며 죽기 직전까지도 조각품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의 유언은 "이제야 조각의 기본을 조금 알 것 같은데 죽어야 하다니."라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모든 예술 가운데서 조각가가 신과 가장 가깝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신이 흙에서 인간을 창조했듯이 조각가 역시 돌에서 미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는 조각을 '대리석 안에 갇혀있는 인물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다른 조각가들이 실수한 부분을 다른 대리석 조각에서 뜯어 맞추어 눈가림하는 데 비해 미켈란젤로는 언제나 한 덩어리로 조각해냈다.

그에게 명상을 안겨준 첫 작품은 24세에 조각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함.'이라는 의미의 피에타이다. 피라미드 구도는 레오나르도에게 배운 것이고 성모 마리아의 평온한 얼굴은 그리스 조각의 사실적인 표현을 보여주고 있다.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예수의 신체 구조는 시체의 해부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그렇게 어린 나이의 조각가가 만든 작품이라고 좀처럼 믿지 않았다.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두른 띠에 자신의 이름을 조각해 넣었는데 그가 작품에 사인한 유일한 사례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주문했을 때에는 밋밋한 천장에 푸른 바탕을 칠하고, 덩굴 무늬로 장식하려는 계획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곳에 인류의 탄생화 죽음을 표현하는 340여 개의 인물상을 그려 넣어 르네상스 시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대작을 제자도 쓰지 않고 본인 혼자서 4년 만에 완수해 냈다는 것은 이 작업에 대한 그의 집념과 열정을 증명한다.

미식 축구장보다 1.5배나 큰 크기의 천장에 디자인하고 소묘를 하고 회반죽을 칠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육체적 노고만 하더라도 굉장한 것이다. 천장에 비가 새서 애써 바른 회반죽이 엉망이 되기 일쑤였고 십자가형으로 분할된 원통형 궁륭의 둥근 모양이 미켈란젤로의 작업을 몇 배나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그는 사다리 위에서 몸을 구부린 채 아주 불편한 자세로 작업해야 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를 조각보다는 한 단계 낮은 예술로 보아 경시했지만 천장화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그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형상 미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누드가 일찍이 이토록 거대한 스케일로 표현된 적이 없었으며 이들은 아무런 배경이나 장식물 없이 그려져 있다. 비틀린 인체의 누드는 마치 조각품처럼 얼굴보다 몸통이 더욱 세밀하며, 마치 채색한 돌을 조각한 것 같은 양감을 가지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한 29년 후 미켈란젤로는 같은 성당의 제단 벽에 프레스코 화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그는 이 그림 속에서 예수를 자비로운 구원자가 아니라 엄정한 심판자로서 묘사하고 있고 전체적인 분위기도 매우 위압적이어서 완성작을 본 교황 바울 3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내 죄를 용서하소서!"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미켈란젤로는 움직이는 인간의 육체를 표현하는 그의 재능을 여실히 발휘하고 있는데 400여 개가 넘는 일그러진 육신들이 서로 뒤엉켜서 싸우며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로마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재건을 지휘하며 건축에도 투신했다. 일생 동안 신체의 아름다움에 열중한 사람답게 그는 "건축 구조도 인체의 구조에서 유래한다."라고 믿었다. 즉 인간의 팔과 다리가 몸통을 중심으로 양쪽에 위치하듯 건축 구조도 또한 수직 축을 이루는 중앙을 둘러싸고 좌우대칭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설계한 혁신적인 스타일의 가장 좋은 예는 르네상스 시기 최초의 공회당인 로마 카피톨리누스 언덕이다. 이 언덕은 고대 로마의 상징적인 중심부였으며 교황은 이 언덕이 예전의 위대함을 회복하기를 기원했다. 원래는 두 개의 건물이 어색하게 80도 각도로 기대어 맞대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중앙에 또 하나의 건물을 지음으로써 기존의 건물이 좌우에 위치하도록 배려하여 이 단점을 보완했다. 그리고 양쪽 건물의 정문을 다시 디자인하여 서로 비슷하게 보이게 했으며 앞쪽을 트이게 하여 바티칸이 마주 보이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이 바로 타원형의 도로 위에 놓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타원형은 불안정해 보이기 때문에 건축에서 되도록 피하는 형태였으나 미켈란젤로는 과감히 사용하였다. 그에게 측량과 비례는 수학적인 공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바에 의해'결정되는 것이었다.